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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보다 사람에게 이로운 ‘도자기 농사꾼’ 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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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Comments  1,607 Views  22-04-06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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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8대째 도예가 집안 미산 김선식씨
자식에게 먹이겠다는 심정으로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지은 농사는 투박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곡식이 된다. 하지만 과다한 비료와 농약를 남용하며 욕심으로 지은 농사는 화려하지만 땅과 사람을 해치는 독이 된다. 결국 ‘진짜 농부’라는 이름은 농사의 중심을 ‘땅’과 ‘사람’에 두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정직한 땀의 결실이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관음요(觀音窯)의 도예가인 미산(彌山) 김선식(金善植·45)씨는 ‘도자기=농사’라는 철학으로 25년 여를 도자기만 바라 본 사람이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름을 날리는 스타 도예가로 살기보다, ‘사람에게 이로운 도자기를 만드는 진짜 농부’로 살기 위해 오늘도 전통가마 앞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씨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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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김선식씨

170년 전부터 이어온 집안 전통 잇고
색.형태 변화 주며 현대적 감각 입혀
경명진사.관음댓잎도자기 등 각광

◇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전통 계승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있다. 직역하면 ‘옛 것을 익히어 새 것을 안다’는 의미다.

도공 김선식씨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로 법고창신과 온고이지신 만큼 딱 들어맞는 표현도 없다. 8대째 도예가 집안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기에 ‘옛 것’에 해당하는 ‘법고’와 ‘온고’가 합당하며, 집안 대대로 내려온 도자기 전통에 그만의 현대적 감각을 더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 온 것은 ‘창신’과 ‘지신’에 접목할 수 있다.

- 집안 내력이 궁금하다.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 조상들이 처음 도자기를 시작하셨고, 170년 전 저의 조상이신 전 경주 김씨 계림군파 3대 김영수 도공이 관음리에 가마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문경에서 가업을 잇게 됐다. 8대 가업 계승은 국내에서 우리 집안 뿐이다.”

- 현재 집안의 가업을 잇는 자손은.

“6대조 할아버지 밑으로 백부이신 김천만, 저희 아버님이신 복만, 숙부이신 정옥 3형제가 계셨다. 세 형제 모두 도자기를 하셨고, 위로 두 형제분이 돌아가시고 지금은 7대 도공으로 숙부님 혼자 생존해 계시고, 우리나라의 유일한 도자기분야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셨다. 백부님의 맏아들이자 저의 사촌인 영식(43)·윤식(41) 동생이 ‘조선요’와 ‘남양요’를 각각 운영하고 있고, 숙부님의 장남이자 저의 사촌인 경식(47) 형님이 작은 아버님과 함께 ‘영남요’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가 ‘관음요’를 운영하며 8대의 가업을 잇고 있다.”

- 대대로 이어져 온 집안의 특징은 무엇인가.

“대대로 청화백자를 만들어 왔다. 정선된 백토(白土)로 기물을 만들고 그 위에 산화코발트(CoO)가 주성분인 안료를 사용해 문양을 그린 뒤 장석유(長石釉) 계열의 투명유를 입혀 1천250℃ 이상 되는 고온에서 환원번조(還元燔造)한 백자의 일종이다. 청화백자 외에도 생활도자기도 많이 만들어 보부상을 통해 전국으로 보급했다.”

- 특히 법고창신을 추구한다고 들었다.

“전통방식을 따르면서도 색과 형태에 변화를 주어 나만의 도자기를 만들어왔다. ‘경명진사’와 ‘관음댓잎도자기’, ‘현신이라보’가 나의 분신들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경명진사’는 부적 쓸 때 쓰는 안료인 경명주사를 활용해 독특한 빨간색을 내는 도자기다. 2005년에 이 도자기로 대한민국 문화예술부문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관음댓잎도자기’는 도자기 요철 부분에 황토를 덧발라 대나무 잎 모양을 낸 것이다. 지난해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지정한 도자기 부문 명인에 선정되는데 일등공신인 도자기다. 3중 유약을 써서 세련미를 강조한 것이 ‘현신이라보’다. 올해 발표했는데 반응이 좋다.”

◇ 8대 도공 김선식의 도자기 인생 시작

돈과 명성을 쫓기보다 예술혼을 따르며 평생 가난하게 살다간 부친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 받은 탓일까. 거센 눈발을 헤치며 찾아가 만난 그는 사나운 날씨와 대조적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겸손한 기품이 흘렀다.

- 8대 도공 김선식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어릴 적부터 도자기를 만드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하지만 선친께서 자식들이 가난한 도공의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선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20대 초반이다.”

- 계기가 있었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8년도에 삼성에 공채로 입사했다. 돈도 벌고 더 넓은 세상도 보고 좋았다. 당시 부모님들은 자식들 모두 대처(大處)로 내 보내고 두 분이 관음요를 지키고 계셨다. 어느 날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기숙사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고향이 그리워 무작정 고향행 버스를 탔다. 집에 도착하니 해가 어스름하게 넘어가고 있었는데, 부친께서 움툭 패여 있는 길에 시멘트를 바르는 일을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이 그렇게 힘들어 보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직장으로 돌아가 바로 사표를 내고 관음요로 내려와 아버지 밑에서 도자기 일을 시작했다.”

- 효심에서 비롯된 회군이었나.

“선친을 위한 것도 있었고, 나 역시 아버지처럼 외지에서 살면서도 도자기에 대한 그리움이 늘 있었다. 계기는 아버지였지만, 결국 근본적인 이유는 도자기라고 봐야한다.”

- 선친의 반응은 어땠나.

“평생 도자기 일을 하셨지만 늘 가난하셨던 아버지셨다. 그래서 자식들이 가업 잇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좋은 직장 그만두고 내려왔다고 처음엔 호통을 치셨지만, 한 참 시간이 지난 후 ‘막내가 있어서 든든하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얘길 어머니께 들었다.”

- 늦게 시작한 만큼 힘들었을 텐데.

“관음요에서 기거하면서 밤새워 도자기를 빚었다. 어릴 때 어깨너머로 물레에 대한 기본을 배웠기 때문에 완전 초보는 아니었다. 한 1년 하고 나니 도자기에 대한 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 낙관을 찍은 것은 언제부터인가.

“1991년부터다. 도예분야는 낙관을 작품에 찍기 시작한 시점을 입문시기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치면 올해가 23년째 되는 해다.”

20대초, 대기업 관두고 아버지 곁 지켜
관음요서 지내며 밤새 도자기 빚기도

◇ 성실하고 깐깐하게 빚는다

“대단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욕심도, 대작을 남기겠다는 욕심도 없다. 그저 사과농사를 짓듯이 사람에게 이로운 도자기를 만드는 도자기 농사꾼으로 살고 싶다”는 그는 8대 가업의 주인공답게 도예가의 삶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 주로 어떤 도자기를 빚나.

“청화백자와 작은 다기, 관상용 항아리까지 다양하다.”

- 법고창신으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도 정립했다. 김선식만의 강점은.

“도자기 색이 맑고, 도자기에 그린 그림이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도자기 색이 맑은 것은 불때는 장작으로 껍질 벗긴 소나무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껍질을 제거했기 때문에 불을 지펴도 투박한 재가 발생하지 않아 도자기에 묻지 않는다. 그래서 도자기 색이 티 없이 맑다. 그림은 그림에 능하셨던 아버지를 스승으로 둔 덕분이다.”


“도공이 도자기를 빚는 일은 전체 작업의 20%밖에 안된다. 나머지 80%는 흙과 장작과 바람과 불이 결정한다. 좋은 도자기를 위해 장작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앞으로 지구 온난화로 우리나라에서 소나무가 점점 사라질 예상하고 10년 뒤를 내다보고 작품 수익금의 많은 부분을 나무 마련에 쓰고 있다.”

- 성실한 도공이라는 명성을 들었다. 왜 그런가.

“보통 도공들이 1년에 3~4번 불 가마에 불을 때 작품을 만든다. 나는 10번 이상 재벌구이를 한다. 불은 밤을 꼬박 새우며 정성을 다해 때야 하는 작업이라 여간 힘든 것이 아니고, 또 전통 장작 가마는 성공률도 가스 가마보다 낮아 그렇게 많이 하기 힘들다. 하지만 전통과 현대미를 아우르는 좋은 도자기에 대한 열정이 힘들지만 쉬지 않고 일하게 이끄는 것 같다. ”

- 전통 가마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작가마에서 구어낸 작품은 가스 가마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깊고 그윽한 색감과 질감을 얻기 위한 것인데 힘들다고 안할 수 있겠는가.”

돈보다 예술혼 중시여긴 부친이 스승
/news/photo/first/201402/img_122093_1.jpg'도자기는 사람이다/news/photo/first/201402/img_122093_1.jpg' 철학 계승 노력
좋은 도자기, 깨끗한 마음가짐 있어야

◇ 스승이자 부친인 7대 김복만 도예가의 예술혼

김선식씨의 부친이자 스승인 7대 도예가 김복만씨는 당시 시골에서 보기 드문 대학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터전을 잡았지만 도자기에 대한 그리움으로 귀향해 도예가의 길을 걸었다.

그가 활동한 시절은 신문물이 밀려오는 시대였고, 빠르고 가벼움을 추구하던 시대에 느리고 묵직한 전통은 시련의 시기였다. 그 역시 시대의 회오리 속에서 평생 가난한 도공의 일생을 살았다.

“당시 문경에 대학 출신이 딱 2분 계셨다. 그중 한분이 아버지셨다. 할아버지 밑에서 독립해 관음요를 이끌어 오셨지만 이재(理財)에 어두운 성격 때문에 늘 가난하게 사셨다. 예술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전형적인 예술가셨다. 돈 되는 찻사발 보다 아버지가 좋아 하시는 항아리 작품에 열중하셨다. 아버지의 항아리 작품은 문경에서도 최고로 인정받았다.”

- 그림에 능하셨다고 들었다.

“서울에서 그림 등의 문물을 접하셔서 필체가 좋고 그림에 뛰어나셨다. 특히 항아리에 그린 그림이 일품이었다.”

- 아버지의 그림과 아들의 그림은 닮았나.

“아버지는 호방하면서도 간결한 화풍이고 나는 좀 더 세밀한 스타일이다. 아버님은 포도문양에 능하셨고, 나는 포도문양도 하면서 나만의 연꽃문양을 창작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려담내야 하는 내공이 필요하지만 보는 이들이 기운이 넘치면서도 담백하다는 평을 보내 준다. 문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담백하다는 점에서 부친과 나의 그림은 닮아있다.”

-관음요(觀音窯)는 불교적 색채가 짙은 이름이다. 어떤 인연인가.

“관음(觀音)이라는 이름은 스님이 지어주신 것이다. 내 호인 미산(彌山)도 스님이 지어주셨다. 관음요는 아버지 때부터 스님들과 인연이 깊었다. 스님들이 아버지 도자기를 좋아하셨다. 국내 스님들 중 관음요 도자기를 모르시는 분이 없다.”

- 스님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아버지는 스님들께 작품 가격을 정하지 않으셨다. 형편 따라 받으시거나 모든 것은 인연법이라시며 그냥 주시는 경우도 많았다. 스님들이 아버님의 그런 순수한 인품을 좋아하시고, 그런 분이 만드신 맑은 작품을 좋아하신 것 같다.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스님들과의 귀한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선친은 어떤 사기장이었나.

“‘도자기는 사람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작품 이전에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셨다. 작품에 대한 자존심은 깐깐하기 그지없으셨지만, 사람에게는 그렇게 호인일 수 없었다. 가난하셨지만 좋은 사람과의 인연을 귀하게 생각하셔서 좋은 작품들을 턱없는 가격으로 많이 주셨다. 그런 큰 고목을 2002년에 갑자기 잃게 되면서 망연자실 했었다. 지금은 아버님의 그런 정신을 나 또한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 시대를 앞서가는 도자기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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