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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요’8대도공 김선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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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Comments  1,640 Views  22-04-0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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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의 도공마을 관음리

사람들의 왕래가 쉽지 않던 옛날. ‘머나먼 섬마을’ 진도 사람들까지도 ‘문경새재는 몇굽이냐~’고 아리랑가락 따라 노래했던 경북 문경은 첩첩산중 골짜기다. 수행도량으로 이름 높은 봉암사가 있는 희양산에서 해마다 실족사고가 날 정도로 문경새재는 험하기도 하다.

94563753e0f8a1877383213ec784b9b3_1649214208_3385.jpg150여년 전 하늘재 고개 넘어 이곳 관음리에 터를 잡은 경주김씨들은 자기(磁器)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경주김씨 계림군파 1대 도공 김취정(金就廷)과 2대 광표(光杓) 할아버지는 이곳 어른인지 확실치 않다고 한다. 다만 3대 영수(永洙) 할아버지부터는 이곳에 가마를 짓고 눌러앉은 것이 확실하다. 그가 지은 150여년 전의 가마가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손들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왜 조상이 이리로 왔는지 확실히 모른다. 불과 20년 전까지 ‘굶기를 밥먹듯 한’ 상황에서 조상의 내력을 추적한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였으니까. 지금 와서야 짐작해보면 조선시대에는 조공과 함께 도공(陶工)을 중국으로 보냈는데, 이것과 경주김씨 도공들의 ‘험난한’ 문경새재행은 무슨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말하자면 ‘중국행’을 지시받은 경주김씨 도공들이 심심유곡 문경땅으로 숨어들어왔을 가능성 같은 것….

1대 도공 취정(就廷)과 그 아들 광표(光杓), 영수(永洙), 낙집(洛集), 운희(雲熙), 그리고 6대 장수(長壽)까지 논이나 밭 대신에 자기를 굽는 가마와 물레, 그리고 도자기 기술을 물려주었다. 대대로 서민을 상대로 한 막사발과 백자를 굽던 자손들은 도공의 숙명과 함께 가난도 물려받았다.

# 8대 도공 김선식의 사부곡

마을 이름을 딴 ‘관음요(觀音窯)’의 8대 도공 미산(彌山) 김선식(金善植·32)씨는 한달 전 급작스레 아버지 김복만(金福萬)씨의 상을 당했다. 아직 49재를 마치지 못한 아들은 아버지가 문양을 그린 청화백자들을 들여다보며 아버지를 회상한다.

“아부지가 술을 워낙 좋아하셨거던요. 그래서 운전면허가 없으셔요. 대신 탈탈거리는 구식 ‘팔팔 오토바이’ 타고 윗동네 가마랑 여기 아랫가마를 댕기셔서 지가 좋은 오토바이 한대 사드릴라 캤는대…”

요즘 젊은사람 같지 않게 선하고 순박한 말씨며 허름한 옷차림이다. ‘김선생님’이라고 불렀더니 팔까지 내저으면서 “아이구, 지가 무슨 선생님입니꺼, 지는 예술가가 아니라요. 그냥 어깨너머로 아부지 하는 거 보고 배운 것 뿐입니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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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아부지가 그러셨거던요. ‘난 농사지을 땅뙈기가 없으니까 자기농사 짓는다. 세끼 밥만 먹을 수 있으면 더 욕심부리지 마라’ 하셨심더”.

아버지는 너무 사람이 좋아서 사기도 많이 당했다. 7남매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기를 밥먹듯 할 때, 아버지는 막사발이랑 자기를 가방에 넣고 부산까지 팔러 갔다. 일본 사람을 소개해준다는 말만 믿고서 간 아버지는 도자기를 가져간 사람이 돈 가져오기만 기다리다가 허탕을 치고 한달 있다가 술에 취해 돌아왔다. 잔뜩 기대하던 아이들에게 오징어 다리 몇개만 주머니에서 꺼내주었다.

“그땐 좀 원망을 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원망 안합니더.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이지예”

# 스님들의 단골 관음요

대대로 내려오는 포도문양 그려진 청화백자 다기가 참 순박하게 곱다. 전국 선승들이 한철씩은 꼭 살고 간다는 봉암사 아래 허름한 ‘관음요’의 다기는 전국 각지의 절로 흩어지는 스님들의 바랑 속에 어김없이 들어있었다. 스님들의 유일한 사치품이랄 수 있는 다기는 이렇게 스님들을 통해 입소문이 났다.

“스님들이 그러십니더. 물건이 좋은 것보다 그걸 만드는 사람이 맘에 드니까 사간다구요”

아직도 스님들에게 판매되는 다기세트에는 가격이 없다. 사람 좋은 부자는 얼마냐고 묻는 스님들에게 ‘그냥 되는 대로 주세요’ 했고, 스님들은 형편에 따라서 얼마씩을 내고 소중히 다기를 가져갔다. 그리고 이곳의 단골이 되었다. 지금도 고객의 80%는 스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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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만드는 일은 농사만큼 힘듭니더. 폼 잡는 멋있는 일은 결코 아니라예. 폼나게 물레만 돌리면 다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건 10%도 안됩니더”

우선 준비작업부터 만만치 않다. 흙에 물을 부어 고운 흙을 걸러내는 수비작업을 해야 하고, 나뭇재와 돌가루, 물을 섞어 유약을 만들어놓아야 하며, 장작을 준비해야 한다. 그 다음에야 자기를 만든다. 물레를 돌려 자기 모양을 만든 후 가마에 불을 때서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를 한다. 가마에서 이틀쯤 식혀서 꺼내면 반 이상은 건지질 못한다고 한다. 간편한 가스가마가 아니라 장작으로 불을 때는 흙가마이기 때문이다. 망댕이(흙덩이)로 제비집 짓듯이 촘촘히 쌓아 올린 흙가마를 고집하는 이유를 물었다.

“가스는 중동에서 수입한 거잖아예. 장작은 우리 나무라요. 우리 흙으로 만든 자기가 우리 흙가마에서 우리 나무를 땐 불로 맨들어지면 우리의 기(氣)에 맞는 거거든요. 그 잔에 차를 담아 마시면 저절로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라요”

# 아버지의 용문항아리

가마의 봉통(맨아래 아궁이)부터 불을 때면 저절로 윗가마가 예열된다. 그리고 차례로 하나씩 위로 올라가며 불을 땐다. 불에도 색깔이 있는데 처음엔 붉은 불꽃, 그 다음엔 푸른색, 마지막에는 색이 없는 투명하게 맑은 불꽃이 된다. 가마의 맨앞엔 진사자기, 그뒤엔 백자, 분청, 사토자기의 순으로 줄을 선다. 이렇게 가마에 들여놓은 후에는 도공의 손을 떠나는 것이다. 이 다음부터는 불과 공기의 조화일 뿐이다. 그래서 도공들은 가마를 ‘익히기’ 전에 정성껏 고사를 지낸다.

“40일에 한번씩 불을 때는데 한 가마에 다기 30세트, 막사발 30개, 개별 자기 20개 정도가 나옵니더”. 전국에서 들어오는 주문을 대기가 그래서 벅차다. 최소한 두달 전에는 주문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장담할 수는 없다.

“아버지 상을 당하고서는 한동안 전화를 꺼놨거든요. 그랬더니 전화기에 어떤 비구니 스님이 ‘등짝을 패뿌리기 전에 얼렁 받으라’고 하셨더라구요”

1년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아버지가 쓰던 윗동네 가마와 아랫 가마를 손봐야 하고, 수비작업도 마쳐야 한다. 그러나 아직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도공 김씨는 “돌아가시기 전에 아부지가 저 용문항아리에 세개 그리시면서 담배를 꼭 두갑 피우셨더랬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작업장의 아버지가 그린 백자는 아직 초벌구이만 되어 있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항아리를 재벌하러 가마에 넣기가 두려운 듯했다. 행여 망치기라도 하면 어쩔까 싶어서. 아마 한동안 아버지의 그 용문 항아리는 작업장에서 아들의 작업을 지켜볼 것 같았다.


/문경/이무경기자 lm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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